시모음/계절

겨울나무에 관한 시모음<2> [겨울 시] [겨울나무 시]

하늘과호수 2023. 1. 18. 21:44

 

 

겨울나무에 관한 시모음<2> [겨울 시] [겨울나무 시]

 

겨울나무 / 오보영 

나 비록 지금은
앙상해진 모습으로

볼품없을지라도
내겐 희망이 있단다

파릇한 새싹
싱싱한 잎으로 단장을 해서

기다리는 님께 기쁨을 주고
풍성한 맘 안겨다줄
꿈이 있단다

 


겨울나무 / 이해인

내 목숨 이어가는
참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눈 감아도 트여오는
백설의 겨울 산길
깊숙이 묻어 둔
사랑의 불씨

감사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날
살아갈 날
넘치는 은혜의 바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가는 세월
오는 세월
기도하며 드새운 밤

종소리 안으로
밝아오는 새벽이면
영원을 보는 마음

해를 기다립니다
내 목숨 이어가는
너무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겨울나무 / 나태주

  

빈손으로 하늘의 무게를

받들고 싶다

 

빈몸으로 하늘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벗은 다리 벗은 허리로

얼음밭에서 울고 싶다.

 

 

겨울나무 / 박덕중

 

옷을 벗는 일은 슬픈 일이다

맨살 드러내는 일도 슬픈 일이다

맨살로 노래하고

맨살로 춤을 추고

체온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벗겨진채

살갗에 내리는

치욕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잎새하나 없는

벌거벗은 겨울나무야

밤 하늘의 반짝이는

수 많은 별빛 아래서

빛나는 음악을 타고 흔드는

너는 언제쯤

잠이 들려나.

부끄럼 벌거벗고 흔드는

겨울나무야

 

 

겨울나무 /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산울림도 울리려나

 

어이없이 울게 될

내 영혼 씻어내는 음악

들려주려나

그 여운 담아들

 

쓸쓸한 자연

더 주려나

아홉하늘 쩌렁쩌렁

산울림도 울리려나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겨울나무들 / 용혜원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여름날 그 찬란한 햇살 속에

아름답기만 하던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는

가지마다 서로 외로움을 비비며

추위에 떨고 있다

아니다 아니다

벌써부터

봄이 오는 걸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모든 손을 다 들고

환영하기를 시작한 모양이다

 

 

나목(裸木) / 정연복

 

봄, 여름, 가을

잎새들 무성한

찬란한 세 계절에는

스치는 바람에도 뒤척이며

몸살을 앓더니

겨울의 문턱에서

그리도 빛나던 잎새들

털어 내고서는

생명의 기둥으로  

우뚝 서 있는 너

떨칠 것 미련 없이 떨치고

이제 생명의 본질만 남아

칼바람에도 미동(微動) 없이

의연한 모습의

오! 너의 거룩한 생애

 

 

겨울 나무 / 홍수희

 

하릴없이 눈 내리는 이 벌판에

나 이대로 서 있겠네

 

고독이 그대로 사랑이 되기까지

어둠이 그대로 별이 되기까지

침묵이 그대로 노래가 되기까지

 

수천의 고독과

수천의 어둠과

수천의 기나긴 침묵이 모여

 

그리운 그대의 얼굴이 되기까지

 

나 여기

있었고 있었던 그대로 서 있겠네

 

 

새해, 나목(裸木)의 말 / 정연복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얼까

 

오십하고도 다섯 해를

더 살았으면서도

 

인생의 뜻 아직 몰라

이따금 흔들리는 내게

 

저 동장군의 위세 속

나목(裸木)이 말없이 말하네.

 

'산다는 것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나

 

한 몇 백년 살다 보니

이제 나는 좀 알 것 같애

 

산다는 건 그저

중심 하나 우뚝 세우는 것

 

겉으로는 발가벗었어도

안으로는 얼마든지 의연한

 

뿌리 깊어 곧은 마음 하나

목숨처럼 지켜 가는 것

 

그 마음으로 생명이나 사랑 하나

짓는 것 아니겠어.

 


겨울나무 / 김후란

침묵하는 나무
고집스레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긴 그대

빛을 받아 반사하듯
나도 향기로운
한 그루 나무 되어
침묵의 응답을 보낸다

휘젓는 바람
창연한 고요 속에
차디찬 달빛 날을 세운다

아무도 봄을 믿지 않는 이 시각에
기다림을 배워 준
나무의 인내
봄은 내 가슴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나목裸木 / 이현우

이제 곧 자유를 얻으리라.
아름다운 전쟁도 막을 내리고
꽃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마침내 바람으로
몇 안 남은 미련마저 다 지워버린
겨울, 여백의 평화.

 


나목 / 성백균

추울 텐데
한 잎 한 잎 입성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겨울 문턱을 들어서는
나목

삶이란 나목처럼
때가 되면 내려놓는 것
나뭇잎 떨어지듯 명예도 권세도 부도
다 내려놓아야 편한 것
거친 겨울바람도 쉽게 지나가고

지나가야 다시 올 수 있지
차면 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고
그러니까 회계도 하고 가난도 이기면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지

알몸, 저 겨울나무
춥기야 하겠지만, 수치는 아니야
용기지
봄은 용감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

 

 

겨울나무의 기도 / 정연복

 

사람들만 기도하는 게 아니다

겨울나무들도 기도한다

 

성당 담벼락에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난방이 들어오는

따뜻한 기도처가 아니라

 

갑작스런 한파가 들이닥친

추운 세상의 한복판에서

 

푸른 하늘 우러러

온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끝내 인내할 수 있도록

 

흔들림 없는 굳센 용기

강인한 생명의 힘을 달라고

 

숨길 것 하나 없는

알몸으로 간절히 드리는 

 

저 겨울나무들의

말없이 정직한 기도. 

 

 

겨울나무 / 김근이
          
추운 겨울
기도에 잠입하는
겨울나무
하늘을 향해 묵상하는
가지 끝으로
봄이 내린다.

 

 

겨울 나무야 / 용혜원

 

생생 불어대는

찬바람이

심장의 온도를 떨어뜨려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내 앞에

 

보초병마냥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겨울 나무야

 

여름날

찬란한 햇살 아래

푸르른 옷을 입고

자태를 마음껏 뽐내더니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칼질하는

한겨울에도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목이 되어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구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우리가 연인 사이였다면

난 반하여

청혼하고 말았을 것이다

 

 

겨울나무 / 김승동

 

혼자서 쳐다보는 하늘이 왜 그리 시린지

소매 끝에 바람 한 점 묻지 않아도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눈가에 마른 물기가 반짝이는지

어둠이 하얗게 바랜 아침

찢어진 편지지를 날리듯 흩어지는 눈발아래

왜 그렇게 울음이 나오는지

 

땅 속 깊이 다리를 묻고 서있어도

어찌하여 온 몸이 비틀거리는지

밤을 지샌 귀앓이에 세상 인연을 끊고

아픔을 삭여 가지 끝에 보내 보지만

어찌 속껍질마저

차가운 불면에 빠져드는지

 

우두커니 서서

목젖이 아프도록 바람을 삼키다가

삭정이를 쪼아대던 딱새 마저 떠나간 날

서럽도록 적막한 이 낯선 사실이

부디 사실이 아니었음을

 

 

겨울나무의 시 / 홍수희

               

내게는

최소한의 수분만 남겨놓습니다

 

흰눈이 내 어깨에 쌓이고 쌓여

당신 없는 어둠 하얗게 견디도록

 

따스한 위로의 한 말씀 안 주셔도

침묵 속의 기약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랑은 채워지지 않는 술잔처럼

늘 목마르고 무작정 슬픈 일이었지만

 

겨울이 깊으면 깊을수록

내 것으로 내가 얼어붙지 않기 위하여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뿌리 아래 조용히 흘러보냅니다

 

이제 내가 당신의 빈 잔을 채워드릴

차례입니다

 

 

겨울나무로 서서 / 목필균

   

나 이젠 서슴없이 동안거에 들어갈까 해

고단한 허울 다 벗어놓고

홀가분한 가슴이 되는 거야

 

영하로 내려갈수록

바람의 뼈대를 세우고

한 계절 온전히 견딜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부산한 세상 바람

단단히 걸어 잠그고

침묵의 동안거로 들어서는 내겐

겨울은 가장 평화로운 나라이지

 

 

겨울나무 가지치기 / 김재진

 

인적없는 깊은 산마루 기슭의

고욤나무에 찬 서리꽃 내려서

한알 두알 근심을 떠나보냅니다

허기진 산 벗은 눈 망에 담습니다

 

산 아래 어스름 불빛 고택에는

노부부가 도란도란 의지합니다

안채 뒤뜰 오롯한 담벼락 뒤서리

유실수가 아름드리 보기 좋습니다

 

햇살과 바람과 가랑비 근근하니

고욤나무는 속 응어리 터집니다

노부부의 지혜 담긴 성근 열매는

출가한 자식도 인정하니 선물입니다

 

어수룩하니 움츠린 겨울나무 가지는

애련하나 잘라줘야 소담스럽습니다

못난 겉까지는 땔감으로 산화합니다

무녀리 산지기는 한껏 가엾은 마음입니다

 

 

겨울나무는 / 임영준

 

겨울나무는

이유 있는 서러움이 걸려

허청거릴 수밖에 없어

한 해를 꼬박 다 바쳐

잉태했던 핏줄들이

허망하게 떨어져나가고

해갈할 수 없는 혼돈만 남아

깊이 주름 짓고 있는 거야

가끔씩 눈보라가

어루만져줄 때에야

비로소 사무치는 뿌리를 딛고

호소할 날들을 헤아려 보기도 하는 거야

나름 까닭 있는 몸짓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