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음

강추위 시모음 [추위] [강추위]

하늘과호수 2022. 12. 19. 16:34

 

 

강추위 시모음 [추위] [강추위]

 

강추위 / 최남균

 

웅그리는 것은

식어가는 밥알의 추억 탓

갈탄 난로에 빙 둘러앉은

양은 도시락

기다려지는 마음 까맣게 애태우며

창가 엷은 커튼에

‘철수♡영희’ 입김 서려 있는

네 번째 수업시간

고래고래 들이지르는 빈 종소리

교실 안 가득 훈김을 빼면

시끌벅적

한 끼 거른 강추위

도시락 뚜껑 젖히면

하얀 밥알 등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방과 후

얼마나 추웠던지

도시락 통 속에서

달가닥거리던 강추위

 

 

강추위 / 박인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시베리아의 헥토파스칼이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또 한 번의 시련을 안겨준다.

냉기는 살갗으로 파고들어

뼛속까지 송곳으로 찌를 때면

삶의 곤고함을 되뇌며

겨울 한 복판을 걸어야 한다.

강마저 얼어붙고

밤하늘의 별들마저 창백한데

겨울 초입이 두려우니

어찌 넘어야 할 거나

인간사는 이토록 버겁고

혹독한 고통을 견뎌야만하나

살아있음이 은혜라지만

강추위가 나는 두렵다.

 

 

강추위 / 권오범

 

어제까지 패딩점퍼가 무색하리만치

선량하게 놀던 겨울이

밤사이 불량한 정치에 물들었는지

복병처럼 달려들어 겁탈하는 아침

 

반항조차 할 수 없도록

예민한 부위부터

맵게 물고 늘어져

순식간에 얼얼해진 손

 

목이 움츠러들게 귀를 사정 없이 핥더니

매운 입김 앞세워 코가 훌쩍이도록 들락날락

드디어 입술마저 굳도록 채워나가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

아, 얼마 못가 무너질 것 같은 남자의 자존심 쌍방울 마지노선

 

가만, 속수무책인 이목구비 늦게 범하는 걸로 보아

생판에 정면충돌하려니 그래도 양심이 있었나

아니면 평소 내가

그렇게도 낯이 두꺼웠나

 

 

강추위 / 권오범

 

밤새 옆집 수도계량기 조몰락대다 결딴 내

물난리 나자

미친 물 바스라지게 끌어안고

온동네 시끄럽게 마당에서 뒹굴더니

출근하는 날 보자마자

어떻게 해보려고 집적거려보지만

강도 같이 복면한 내 매무새

도대체 빈틈이 있어야지

애먼 눈이나 찔러대며

지하철역까지 밥맛 없게 따라오더니

무임승차 마음에 걸렸는지

슬그머니 에스컬레이터 타고 도로 나가버린 엉큼한 것

생면부지 아가씨와

어깨 맞댄 채 온기 나누느라

아까 당한 섬뜩한 일들은

까맣게 잊었건만

내가 나갈 종로3가 구멍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계단으로 복병같이 달려들어

할 얘기가 있으니 복면 좀 벗으라며 또 사정사정

 

 

강추위 / 오보영

 

네 아무리
꽁꽁
세상을 다 얼어붙게 해도

님 향한
내 발걸음
막아서지 못하리

품은
가슴은
얼리지를 못하리

 

 

강추위 (极寒극한) / 윤재철

 

하늘도 움추리고 땅도침묵한

몰강스런 날에

바람은 회초리같다

 

구겨진 종이조각 같이

들녁은 널부러져 굴러가고

 

저너머 얼어붙은

성주산이 스멀스멀

자꾸만 내게로 다가온다

 

거리에 오가는 발자국이

겅둥겅둥 빨라지고

 

떠도는 나그네 바람만이

내 창문에서

밤새 두런거린다

 

 

강추위 단상(斷想) / 임재화

 

먼 산자락 저만치서 불어와

치켜세운 옷깃을 열어젖히고

귓가에 쌩하고 스치는 찬바람

얼굴마저도 스쳐 지날 때

날 선 면도날같이 날카롭다.

 

코끝으로 다가오는

싸늘한 향기는 너무나 맵고

꽁꽁 언 손을 녹이려고 맞잡고

호호 불면서 두 손을 비벼 녹인다.

 

온종일 성난 북풍은

사정없이 숲에서 불어오고

모든 것 아낌없이 내놓은

겨울 나뭇가지 위에 걸려있는

잿빛 구름도 몹시 차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