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대 시모음<2>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갈대밭에서 / 안종환
조용한 바람에도 흔들린다
맺힌 서러움 얼마나 많기에
서걱서걱 울면서 몸부림치는 걸까
한 때
외로움에 목말라 흔들렸던 나처럼
참을 수 없는 사무침이 있는 거겠지
아니야
뿌리 째 흔들리는 게 아닌 걸 보면
바람을 위해 흔들려 주는 게야
시름시름 죽어가는
강물 땜에 울고 있는 게야
가끔은
누굴 위해 흔들려 주고
때로는
누굴 위해 울어주는 것이지
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갈대숲에서 쉬고 있는 바람에게 / 오광수
자네 울고 있는가?
살아온 세월이 꼭 꿈만 같은 건
자네나 나나 똑같은 마음.
어렴풋이 자네 우는 소리가 들리는듯하여
물소리 숨 재우고
달빛 내려와 만든 물결에 나도 시름 얹어보네
산다는 게 어찌 보면 한 시절 바람 같은 것
좋은 시절도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도
세월이 만드는 바람 따라 그렇게 지나가고
남은 건 약해진 몸뚱이에 굵은 주름 흰 머리칼
생각하면 서글프지? 그럼
그러나 조금만 울게
꽃 피워 벌 올 때는 지났지만
깨물고 싶은 귀염들이 조롱조롱 웃으며 달려오면
휘- 내 한숨 한번 뽑아 내던지고
이젠 지겨운 보릿고개 이야기보다는
어깨 들썩이며 손 휘젓고 랩으로 맞이해야 하니까
갈대 숲 / 박인걸
황무한 습지에서
가녀리어 슬퍼보였다.
강바람에 비틀거리며
자주 울어야했다.
기댈 언덕조차 없어
허우적거리다가도
스스로 일어서고
땅을 짚고 또 일어섰다.
꺾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빳빳한 자존심으로
버티며 살아야 했다.
의식이 눈을 떴을 때
갈대는 자아를 보았다.
옆에 서 있는 갈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부둥켜안은 갈대는
은빛 파도를 친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어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갈대밭 추억 / 권오범
더펄머리 미소에 여드름 돋던 시절
철없는 언약에 머뭇머뭇
앙가슴 자진방아 찧던 자리가
여기던가, 저기던가
아직도 끈적이는 듯한 밀어들
갈게 들이 거품 물고
니퍼 닮은 엄지손톱으로 찾아내
맛있게 꼬집어먹느라 바쁘다
철새들 신접살림 깨 쏟아지건만
눈먼 강바람 뭍에 올라 헤살 놓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미로 헤매느라 바스락대는 시월 후보름
갈대처럼 서리이고 찾아와 둘러보니
세월에 서름해진 고향 강변
철새들 사랑노래만이 귀에 익을 뿐
안개 속으로 어렴풋이 스치는 너의 얼굴
갈대 섰는 풍경 / 김춘수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푸른 갈대 / 박종영
여름내 푸른 강물과 놀아나다
속울음 감추고
푸르게 웃자랐구나
새움 솟아오르던
어린 철부지 시절이 엊그제인데
물새 떠난 자리 움켜쥐고
괜한 그리움이 가득하구나
소소하게
초가을 바람이 흔들고 가면
구름처럼 쏟아지는 갈대꽃 웃음.
숨막히게 안아보는 강가에서
가슴까지 차 오른 시린 세월,
한 움큼 눈물로 감추고
메마른 바람으로 떠나는 여름을
손 흔들어 주고 있구나.
갈대의 지조 / 오보영
서로 더 잘 낫다고
앞 다투어 자랑하던 꽃잎 나뭇잎
한순간 찬 서리에
스러진 후에
숲 찾는 님 허전한 맘
달래주려고
아껴둔 뽀얀 자태 출렁이면서
님 오시는 길목에서 마중한다오
지조 없이 바람결에
쉬이 흔들린다고
뒤에서 수군대며 흉들 보지만
님께 보일 꼿꼿한 몸
상하지 않으려
결따라 즐거웁게
춤을 추는 거라오
갈대의 순정 / 윤갑수
갈 기슭에 갈꽃들이
허공을 털고 있다
아무리 밤낮없이
갈목을 휘둘러 데도
쪽빛하늘에 조각구름
유혹하듯 머무니
햇살이 뚝뚝 떨어져
그대 눈에 내려 않고
가을을
덤으로 음미하고
훌훌 떠나가는 갈꽃
생각하는 갈대는 / 김용호
생각하는 갈대는
세찬 비바람이 불어와 흔들려도
앞이 안보이게 눈보라가 쳐와도
함초롬한 모습으로
몸과 마음을 곱게 추스르며
뿌리만은 흔들리지 않는
야무진 자생의 힘으로 잘도 적응한다.
대롱대롱 매달린 이슬방울
밀어내지 않고 포용하며 스스로 떠날 때까지
함께 어울릴 줄도 알고
노을 빛에 꾀죄죄하고 궁상스러운
초라한 모습 내보이지 않는 생각하는 갈대는
곱게 늙어 가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몸을 꼬아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무리를 볼 줄 알고
새로 올 찬란(燦爛)한 내일을 맞이할 줄 안다.
생각하는 갈대는
그냥 서있으면서 하늘을 볼 줄도 모르고
참새들이 날아왔다 자기를 보고 놀라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말 걸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들을 바라보고 저 멀리 홀로 서있는
생명이 없는 외로운 허수아비에게 나지막하게 말한다.
생각 좀 해보라고 ……,
갈대 / 김인숙
강기슭에 모여
고요히 몸을 낮추어
한마음으로 올리는
그대들의 기도는 무엇인가요
찬바람이 불고
물 비린내가 올라오는 강둑
그대들의 숲에는
평온한 저녁노을이 내려오고
건너편에 보이는 고층 건물
화려한 불빛
하늘을 치솟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흔들리는 세상에 휩쓸려 불안한
발걸음
그대들을 바라봅니다
나보다 낫습니다
갈대밭 / 김정호(美石)
달빛에 취해서
작은 바람에도 몸을 비틀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하고
새벽 안개 속에
아침 햇살이 쏟아지면
이슬 젖은 머리칼을 떨어내고
또 하루를 연다
은빛 깃털은 이끼 낀 바위에
씨앗을 뿌려
농게의 겨울 보금자리를 만들고
부석대는 갈대 소리에
바람이 놀라
갈대밭을 황급히 지나간다.
갈대 / 유희봉
저 거센 바람 속에서
온 머리 다 희도록 목을 놓는
뿌리깊은 몸짓
그리움이 밀려오는 강 언덕
함부로 움직이는 법 없이
흔들리지 않는 중심
생긴 모습 데로 보여주는
진실한 자연의 법정에서
마음을 고백하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정에 빠져드는 소박한 심성
스쳐 가는 실바람에도
가지가지 걸친 옷을 벗어 놓아
가슴 깊게 숨겨 온 다리
나는 기우 뚱 균형을 잃고
흰 머리칼 사이 그대 손길 따라
눈 잎에 뵈는 것도 잠시뿐
그리움과 그리움을 지나
서로 비비며 서걱거리며
돌아가리 천진한 삶이 있는 곳
갈대의 노래 / 윤예주
잃어버린 꿈들이
촉촉이 젖어오는 갈대밭에
찬연스레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사돈처럼 찾아온
아픈 기억들이 열병을 앓듯,
사각대던 이별의 노래가
가슴만 적시는데
등골을 타고
또 다시 가슴에 녹아들면
댓잎엔 수옥(水玉)같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고
느낌으로 다가온
흘러가 버린 세월들이
어느새 그리움 되어
뼛속 마디마디
자리 틀고 앉아
저녁노을 질 때까지
시린 바람결에 사각대는
너의 노래는
내 가슴을 또 흥건히 적신다.
갈대 / 한병진(韓秉珍)
바람이 분다고
내가 넘어지는게 아니다
허허로운 벌판이 음악도 없이
춤추는 것이 외로워서다
두 팔 안에 수많은
사랑이 갇혀 있어도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흔들려 더욱 외로웠다
부딪혀 살면서
소리를 내지만 서로 꺽이지
않아 파도가 되고
아우성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를 써보지만 그건 사는게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바람이 지나간다
넘어져야 소리가고 흔들려야 노래 된다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냐고
보라 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껍질을 벗겨질뿐 털어지는게 아니니
갈대가 슬피 우는것도
지나가는 바람 때문이 아니다
가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토해내는 것이 벅차기 때문이지
휘어진 인생 흰 눈이 내리면
새로운 지지개를 위해 비로소 눕는다.
갈대는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김종제
어제 내린 빗줄기만한
가는 허리 가져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는 것이
내가 가진 모습의
전부(全部)라고 생각하지 마라!
숯돌에 갈아놓은
날카로운 무기의 칼이 없다면
그렇게 쉽게 나를 꺾을 수는 없을테니
어여쁜 꽃도 환희로 빛나는 열매도
아닌 것을 지닌 채
몸 하나 땅을 딛고 일어섰지만
민초(民草)처럼 살다가 죽다가
속까지 텅텅 비어있는 나를
사방으로 마구 흔들어 놓는 바람
여러 해 지켜볼테니
너, 어디 한 번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고 굳은 맹세를 한다
내가 누구의 마음처럼
이리 저리 가볍게 흔들린다고?
아니다 아니다
갈대는 제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흔드는 중이다
내 흔들리는 몸짓에
따라 움직이는 나무와 강을 보라
내 고개 숙이면
따라 고개 숙이는 산과 새를 보라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여럿이
세상의 중심을 쥐고 흔드는 중이다
흔들릴수록 깊어가는
저 갈대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라
갈 대 / 권용화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 저 혼자 울어도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저 혼자 흔들려도
나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바다가 기어와서 멀리 떨어진
섬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나는 뭍에서 떠나지 않는다.나는 물들지 않는다
저녁 노을이 저 혼자 불타올라도
나는 눈 감고 내 노래를
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