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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딛고 세상을 밝힌 루이 브라유!감동글 2023. 12. 28. 22:08
장애를 딛고 세상을 밝힌 루이 브라유!
시각장애인이 쓰는 '점자'를 영어로 브라유(Braille)라고 합니다.
이는 창안자인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실천적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헬렌켈러는
"사람들이 구텐베르크(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술의 혁신자)에게 진 빚을,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브라유에게 지고 있다"라는 말로 브라유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시각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준 루이 브라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시련
루이 브라유는 1809년 1월 4일 프랑스 파리 인근의 시골 마을 쿠브레이(Coupvray)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3살 때 마구와 안장 제작 기술자인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놀다가
날카로운 송곳에 왼쪽 눈이 찔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한 눈이 멀게 된 루이는 그다음 해에 오른쪽 눈마저 감염으로 실명하는 불행을 겪습니다.
하지만 브라유는 읽고 싶다는 바람을 놓지 않았고, 부모는 그런 아들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제법 유복한 편이었던 브라유는 부모의 지원 덕분에
시각장애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기숙학교인 '파리왕립맹아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루이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입니다.
'파리왕립맹아학교'는 특수교육학자 발랑탱 아우이가 설립한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오늘날 프랑스 국립 시각 장애 청소년 학교로 발전)입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돋음 문자'를 창안했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입학 초기, 아우이가 만든 '돋음 문자'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알파벳을 볼록하게 새긴 형태인 '돋음 문자'는
철자 하나를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식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읽기만 가능할 뿐, 생각을 옮기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야간 문자'와의 만남
브라유는 12살 때 샤를 바르비에(Charles Barbier)의 '야간 문자'를 접하게 됩니다.
'야간 문자'는 프랑스 장교였던 샤를 바르비에가 1821년,
군인들이 전장에서 밤에도 말없이 주고받을 수 있도록 고안한 점자였습니다.
가로 2개, 세로 6개 총 12개의 볼록한 점으로 구성된 '야간 문자'는
체계가 너무 복잡하고 실용성이 떨어져서 활발하게 쓰이지 못했습니다.
또 사용하려면 손끝의 촉각을 연마해야 했기에, 앞이 보이는 군인들은
'야간 문자'를 읽으려고 크게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읽고 쓰려는 열망이 군인들보다 강했기에 '돋음 문자'의 좋은 대안일 수 있었습니다.
바르비에는 시각장애인이 야간 문자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1821년 '파리왕립맹아학교'에서 이 문자를 시범해 보였습니다.
당시, 루이 브라유는 이 학교의 재학생이었습니다.
'야간 문자'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루이 브라유는 이 체계를 받아들였고,
1824년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야간 문자'를 보완해서 자신만의 점자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브라유 점자 탄생
먼저 브라유는 12점이었던 '야간 문자'를 6점으로 줄였습니다.
점자는 점이 너무 많으면 읽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습득에도 불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라유가 만든 점자는 총 6개의 점 만으로 64개의 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체계가 잘 짜여져 읽고 쓰는 것이 동시에 가능했습니다.
점자를 만드는데 그가 사용한 것 역시 송곳.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송곳으로 두툼한 종이 표면에 불룩 튀어나오게 점자를 찍어 많은 이들이 보게 한 것입니다.
브라유는 1829년 그의 나이 20살 때 일반 문자뿐만 아니라
수학 기호와 음악 기호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문자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교사로 활동하던 1837년 점자의 문제점을 보완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브라유 점자'입니다.
사후, 브라유 점자 공인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위대한 발명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마저 브라유가 체계화한 점자 대신 선 점자나 바르비에의 12점 점자 사용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1952년 결핵으로 43살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은 지 2년 뒤에서야 브라유 점자는 시각장애인 문자로 공인받았습니다.
그리고 1860년 브라유 점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인트 루이스(St. Louis)의 미주리 시각장애인학교에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 묻힌 브라유는 사후 100주기인 1952년,
프랑스 정부의 인정을 받아 위인들의 묘지인 판테옹으로 유해가 이장되었습니다.
브라유의 유해가 판테옹으로 옮겨질 당시,
그의 점자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던 헬렌켈러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브라유의 고향인 쿠브레이 마을에도 뒤늦게 브라유 광장이 들어섰습니다.
브라유 광장엔 "이분은 앞을 볼 수 없는 모든 이들에게 지식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 점자 혼란기
브라유 점자가 세계 여러 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는 조금 더 많은 논란과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명 '점 전쟁(The war of dots)'이 그것입니다.
미국 맹교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우(S. G. Howe)는 브라유 점자를 배척하고,
자신이 만든 보스턴 선문자(Boston line type) 사용만을 주장했습니다.
이 밖에도 뉴욕맹학교 교장이었던 웨이트(W. B. Wait)가 1986년 만든 뉴욕 점자(New York point),
퍼킨스맹학교 음악교사인 스미스(J. L. Smith)가 창안한 미국점자(American braille) 등이 난립하여 혼란을 안겼습니다.
이들 문자는 치열한 경쟁을 펼쳤는데,
결국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브라유 점자가
1882년 유럽 회의(European Conference)에서 통일 점자로 채택되었습니다.
한국의 '훈맹정음'
국내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에 의해 점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박두성 선생은 일제강점기 1913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제생원에서 맹아부 교사로 일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안타까워했던 박두성 선생은 1923년 맹아부 제자들과 함께
'조선어 점자 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만들어 점자 만들기에 돌입했습니다.
3년을 연구한 끝에 여섯 개의 점으로 이뤄진 '훈맹정음'이 탄생했습니다.
11월 4일은 국내 점자의 날로 이는 박두성 선생이 한글 점자를 만든 1926년 11월 4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세계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환하게 비춰준 인물일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대담한 도약을 이끌어 낸 인물입니다.
장애를 삶의 걸림돌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힘든 시련도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수 있음을
루이 브라유의 도전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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