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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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함박눈, 대설에 관한 시모음<3>[폭설 시모음] [함박눈 시모음]시모음 2022. 12. 13. 17:57
폭설, 함박눈, 대설에 관한 시모음[폭설 시모음] [함박눈 시모음] 폭설 / 강윤미 공기 속에 숨어 있던 눈이 숨바꼭질을 끝내고 왁자지껄 흩어졌다가 모인다, 폭설 놀이터에 모여 노는 아이들처럼 눈송이들은 서로를 껴안고 쓰다듬으며 내린다 누가 제일 빨리 내려갈까, 누가 바닥을 뭉치고 배신하고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오를까 내기하며 술래잡기하는 눈의 결정 폭설의 커튼을 열고 폭설 위를 걷는 사람들 폭설 속에 갇히면 세상은 가장 큰 담요를 덮은 듯 적요하다 가로등은 파스텔 빛으로 희미해지고 자동차들은 마리아나 해구에 갇힌 물고기처럼 침잠하다 잠잠하다 고립되는 것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고립 아닌 것은 생각할 필요 없다 저녁 메뉴는 이제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이 남자와 저 남자 사이에서 거리 잴 것 없다 폭설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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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함박눈, 대설에 관한 시모음<1>[폭설 시] [함박눈 시]시모음 2022. 12. 13. 17:37
폭설, 함박눈, 대설에 관한 시모음 대설(大雪) / 안도현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폭설2 / 권오범 변방으로 떠돌던 서름한 성깔끼리 우연히 만나 잠시 못마땅했을 테지만 피할 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잠시 몸 좀 풀었을 것을 차들에겐 기압골 오르가슴 분미물은 치명적이라서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만취한 듯 사지가 뒤틀려 비틀비틀 철석같이 믿었던 지하철마저 덩달아 정신 나가 이 처참한 북새통을 어쩌라고 더러더러 손 놓고 하는 말 바쁘면 다른 방편을 찾아보란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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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大雪)에 관한 시모음<1> [대설(大雪) 시] [24 절기 시]시모음 2022. 12. 7. 06:25
대설(大雪)에 관한 시모음 [대설(大雪) 시] [24 절기 시] 대설(大雪) / 안도현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대설(大雪)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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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관한 시모음<2> [첫눈 시] [눈 시]시모음 2022. 11. 30. 20:48
첫눈에 관한 시모음 [첫눈 시] [눈 시] 첫눈 오는 날 / 정호승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첫눈 / 목필균 까아만 밤에 내리는 함박눈 바라만 보아도 순결해지는 가슴속에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하나 한 겹, 두 겹, 세 겹 덮히고 덮히고 덮혀서 아득히 지워졌던 기억 선명하게 다가오는 얼굴 하나 첫눈 / 박인걸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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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관한 시모음<1> [눈 시] [첫눈 시]시모음 2022. 11. 30. 20:37
첫눈에 관한 시모음 [눈 시] [첫눈 시] 첫눈 내리는 아침 / 안희선 지난 밤, 한 겨울의 기나 긴 추위가 뼛 속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아직도, 내 가슴에 속절없이 살아있는 하얀 그리움 그곳에 날아가 못 박히는, 눈물겨운 그대가 아침 햇살처럼 따스합니다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 정호승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파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 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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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에 관한 시모음 24절기 시] [소설 시]<2>시모음 2022. 11. 22. 08:35
小雪소설 / 나상국 24절기 중 20번째 절기 소설이란다 얼음이 얼고 땅이 언다는데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오랜 시간 주고받던 편지 뜨문뜨문 오던 답장 그리고 긴 파열음 시베리아 벌판처럼 꽝꽝꽝 얼어 버렸는데 어느 날부턴가 수신인 없는 곳으로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며 지새웠던 수많은 밤 그해 그 겨울 어느 날 쓰다만 편지지 위에 추적추적 하염없이 비가 내렸었지 아마 그날도 소설이었을 거야 오늘처럼 저렇게 창밖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었지 소설(小雪)을 지나다 / 홍정순 은행잎 지고 겨울비 오는 날 일 피해 사람 피해 찾은 시골집 첫서리 오고, 김장하고 마늘 심은 후 서리태 타작한, 이맘때 바깥 풍경은 나만큼 촌스럽다 누워서도 보기엔 감나무가 최고다 들창에 세 든 지 오래된 모습이라 그렇고, 가지가지 종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