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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강가에서 1 / 전병조
    2022. 12. 14. 16:36

    겨울강가에서 1 / 전병조

     

    겨울강가에 서면

    빛이 가난하여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

    썰매를 탄다

     

    은어의 날개 위에 반짝이는

    불임(不姙)의 삶,

    프리즘을 통하여 복제된

    시작과 중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안달난 일상들이

    자꾸만 미끄러지며 썰매를 탄다

     

    어젯밤 꿈이 현실적 전망으로 바뀌고저

    오늘로 이월시킨 이 손때 묻은 하루

    허리가 휘어지고 거품이 굳도록애 휘저어도

    내일이 없는 이 천막같은 하루

     

    라면을 끓이다가

    문득 불어오는 찬바람에

    두 손을 데어버린

    먹다남은 일상들이

    뱃머리를 중심으로

    팽그르르 맴을 돈다

     

    겨울강가에서 2

     

    이별이란

    그리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바람 속에 흩어지는 먼지의 일상일 뿐

     

    너 멀리 보내고 항시 가슴 아파했던 것은

    그리움이 아니라

    한 조각 굳어진 체념의 눈물이었다

     

    날마다 침몰하며 침묵하는 강물 속으로

    조용히 떠오르는 하늘

    한줌 그물에 여과된 채 망각의 바다로 흐르지만

     

    만남도 헤어짐도

    한낱 눈발되어 흩어지는 저

    잿빛의 하늘 아래

     

    노을보다도 짙게

    바다보다도 낮게 출렁이며 가라앉은

    겨울강가

     

    한 토막 흑싸리며

    한 조각 댓닢같은 일상들이

    모닥불을 피워올린다

     

    허연 동천(冬天)에

    너 녹아 어서 빨리 내 몸을 띄우라고

    물먹은 모닥불을 피워올린다

     

    겨울강가에서 3

     

    달 밝은 밤에

    미류나무 사잇길을 돌아

    불어오던 바람이

    강바닥을 미끄럼질하고

     

    싸리비로 빗질을 하듯

    할퀴고 간 강물의 자리에

    우리네 일상이 굳는다

     

    불빛을 중심으로

    파랗게 달무리 진

    뻥 뚫린 가난

     

    지나간 봄날의 함성들이 산 채로 매장되어

    못다한 젊음의 원혼들이 통째로 화장되어

     

    떠나버린 구천(九天)의

    허이연 뼛가루로 날리다가,

    기어이 울어버린 통천(痛天)의

    시퍼런 달무리로 날리다가

     

    마침내 얼어붙은

    마흔다섯의 희미한 각오들이

    단단한 참나무를 타고앉아

    조각난 일상들을 낚시질 한다

     

    구멍난 양심들을 낚시질 한다

     

    겨울강가에서 4

     

    하얀 불빛 속으로

    어둠 더욱 빛나고

    노을빛 짙게 술 취한 사람들

    성에 낀 일상 위로

    낚싯줄을 드리운다

     

    돈셈의 명예와

    권력의 수레바퀴에 상처받은

    힘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들

    겨울강가에 모여앉아

    강물을 마름질한다

     

    물경(勿驚),

    한 치 표밭을 노리는 소주병들이

    군데군데 강가를 어지럽히고

    칼라풀한 팜플릿에 찍혀진 얼굴들이

    기호 1번, 기호 2번으로 모닥불 속에 타들어간다

     

    인터넷, 인터넷처럼 얽혀진 도시의 구조와

    정치적 권력의 모순들로부터 상처입은

    힘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들

    강 건너 어둠에 떨고 있는 하얀 불빛 속으로

    길고 긴 낚싯줄을 던져 올린다

     

    겨울강가에서 5

     

    물안개처럼

    오늘도 날은 저물었다

    어린날 그리도 힘들게 쓰여지던 일기장처럼

    오늘도 또박또박 연필로 쓰여진 하루

     

    기약 없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부딧히는

    끊고 자르고 맺고 다시 또 풀어야만 하는

    이 색 바랜 일기장의 하루

     

    잔잔한 강물 위에

    노을이 지면

    메마른 가지 위에

    바람이 불면

     

    하나로 둘로

    혹은 셋으로

    불빛을 찾아 모여드는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겨울강가에 천막을 두르고

    술잔을 기울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어린 시절에 대하여 작별을 고하지 않는

    초라한 도시의 꿈 많은 사람들

     

    겨울강가에서 6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초저녁 어설픈 햇살을 받아

    더욱 차갑게 들판을 물들이고

    그동안 앓았던 응달 쪽

    두터운 불신의 부스럼 딱정이들도

    녹는 듯 다시금 날카로운 바람되어 되살아나는데

     

    장독에 어른대는 저녁의 노을처럼

    새악시 옷깃에 묻어나는

    아찔한 분홍처럼

    항시 현실의 문턱에 넘어지는

    삶에의 일상적 몽매에 발목을 잡혀버려

    넘어지며 일어서고

    일어서며 또다시 쓰러지는 갈대의 하루

     

    오늘도 바람에 밀리는 물살에 흔들리며

    먼 빛 물결로 다가오는 섬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쓸쓸한 거품의 꿈만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잠이 드는 갈대의 하루

     

    어스럼 어둠이 찾아드는 겨울강가에

    물소리 바람소리

    집을 찾는 철새의 날개짓 소리

    파도처럼 바스라지는 갈대숲 속

    부스스 댓닢 부딧히는 소리 들려온다

     

    겨울강가에서 7

     

    석양에 노을이 질 때

    나무는 무얼 생각할까

    감원열풍에 밀려나

    마침내 한 폭의 풍경화로 굳어버린

    저기 일상의 강물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 숙인 한 그루 겨울나무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

     

    알 수 없는 계절의 느낌 속으로

    눈물이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초라한 이성의 잔해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하늘

    숨이 막힐 듯

    대기마저 쨍하고 얼어버린 이 겨울의 한 가운데 서서

    나무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

     

    계절의 느낌을

    사람보다 먼저 알고

    사람보다도 먼저 옷을 벗는

    겨울나무를 바라다보면서

    우리는 모두

    철없는 늦깍이 로맨티스트들이다

     

    석양에 노을이 비낄 때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일탈한 일상의 부조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어둠 속 빛나는 거품경제의 얼음을 깨트리고

    물고기와 한판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앙상한 사람의 겨울나무들

     

    겨울강가에서 8

     

    눈물이 맺힌다 목이 메어

    사슴이 뛰어 놀던 자리

    그들에게 목마른 추억들은 없다

    슬픔의 시곗줄에 앙금진 시간들

    피곤한 날갯짓 고이 접어

    먼 들녘의 황금빛 이슬로 아롱질 때

    태양은 오늘 하루 얼마나 눈부시게 빛났는가

     

    그대

    슬픔의 이슬을 받아먹고

    아픔의 비늘들로 온몸을 부풀리며

    불어라,

    고통의 즐거움을 바람과 함께하는

    저 적막의 강가에서

    그러나 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자꾸만 굵어지며 넘쳐나는 이 방랑의 자연스러움

    고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맴을 돌듯

    하나의 원 안에서 자꾸만 미끌어지는 오늘의 일기예보

     

    미로같이 얽혀진 시간의 길목에서

    강물은

    죽은 생선의 눈을 한채 미래에의 길을 묻고 있다

     

    오늘도 별들은 여전히 어둠에 빛날거고

    사람들은 별을 보며 저마다의 행복을 꿈꾸겠지

    하지만 갈 곳도 없고 매일 곳도 없는 나는

    오늘도 어디서 긴 날밤을 지새야 하나

    햇살이 없어도 저절로 빛을 내는 어둠 속 이슬처럼

    어떤 아름다운 상처 하나 남몰래 간직 한채

    조용히 꿈을 꾸는 저 여명의 겨울강가에서

     

    겨울강가에서 9

     

    들리느냐 지금

    내가 저만큼의 거리를 두고

    돌을 던지면

    풍덩, 나의 영혼이 너에게로 잠수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느냐 지금

    네 꽁꽁 언 추억의 일기장 속으로

    하나씩 파문을 이루며 파고드는

    내 사랑의 돌팔매 소리가

    들리느냐 지금

     

    조금씩 조금씩 똬리를 틀어가며

    너에게로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낮은 포복으로만 낮은 포복으로만 다가가는

    내 사랑의 숨죽인 탱크소리가

    네 심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쿵쾅거리며 날뛰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느냐 지금

    나는 지금

    네 강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와 있다

     

    타다 남은 장작은 숯불로 사그라든다

    사그라들면서 더욱 뜨거운 열기로 나는 너에게 남는다

    작은 숨소리마저 꽁꽁 얼어버린 이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너에게 도대체 어떠한 의미로

    사랑을 불태우는가

    네 영혼의 귀퉁이에

    한줌 잿더미로 사라져야 할

    내 무량한 기다림의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가

     

    봄이 오면

    하나로 흐를 것들

    하나로 흘러서

    결국은 연초록 강물이 되어 흩어질 것들

    무엇을 못잊어 나는 지금 이 겨울강가에 서 있는가

    무엇이 그리워 나는 밤마다 너에게 모닥불을 지피는가

    네 심장의 깊은 곳,

    철새도 가고 없는 이 적막한

    겨울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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