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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모(歲暮)에 관한 시모음 [세모 시][송년 시]
    시모음 2022. 12. 26. 11:30

     

     

    세모(歲暮)에 관한 시모음 [세모 시][송년 시]

     

    세모(歲暮) / 박인걸

    세모를 맞아도 거리는 붐비지 않는다.
    코로나가 창궐한 도시는 비둘기들도 도망쳤다.
    마스크 사이로 내비치는 경계의 눈빛들이
    전선 병사의 눈초리보다 더 매섭다.
    연일 튀어 나오는 확진 자 숫자와
    앰뷸런스의 다급한 사이렌이 고막을 가를 때면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심정이다.
    달력의 마지막 숫자가 지워지던 날에는
    한 해를 조용히 갈무리하며
    다가오는 시간들을 설계도면에 그려 넣고
    두 손을 모으고 예배당에 앉아
    세 가지 소원을 적어 간절히 기도했었다.
    보신각 종소리가 광화문 벌판에 퍼질 때면
    Auld lang syne을 힘주어 부르며
    지인과 어깨동무를 한 채
    불빛 찬란한 도시를 휘젓던 시절도 있었다.
    생애 처음 당하는 팬데믹 공포에
    표범에 쫓기는 가젤이 되어
    새해의 경계선을 두 발로 밟으면서도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
    2020년의 세모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세모에 / 권도중

     

    새벽 졸린 출근길 지친 밤 퇴근길로

    기댈 언덕 없이 지치도록 뛰었다

    뜻으로 안 되는 인생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림자 짙은 골목 부산한 발걸음들

    이 겨울 내리 울고 봄싹으로 돋을 수 있다면

    필요한 돈만큼이나 간절한 소망이여

    연하장도 카드도 내년에는 보낼게요

    뿌리를 내리고픈 이 연대를 아십니까

    내 사랑 무거운 만큼 진실로 힘을 주소서

     

     

    세모(歲暮) / 정연복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새해 첫날을 맞이했던 게

    엊그제 일만 같은데

     

    올해도 정말이지 꿈같이

    바람같이 흘러갔다.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들

     

    세모같이 앙칼진

    마음으로 지낸 날들이 많다

     

    좀더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세모(歲暮)의 창가에 서서 /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말을 많이 했던 빈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하지만 이제는 올해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

     

    미운 정 고운 정 들었던

    시간들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동그라미의 마음으로 살자.

     

     

    歲暮(세모) / 白居易(백거이)

     

    已任時命去(이임시명거),亦從歲月除(역종세월제)。

    中心一調伏(중심일조복),外累盡空虛(외루진공허)。

    名宦意已矣(명환의이의),林泉計何如(임천계하여)。

    擬近東林寺(의근동림사),溪邊結一廬(계변결일려)。

     

    이미 때와 운수는 가는대로 맡겼고

    흘러가는 세월 또한 그대로 좇았네.

     

    마음속의 악업을 모두 누르고

    세상의 모든 번뇌 비워버렸네.

     

    훌륭한 벼슬 하려는 마음 이미 버렸으니

    산천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동림사(東林寺) 가까운 곳

    개울가에 초막집 하나 지으려하네.

     

    세모 / 엄원태

     

    해가 저문다

    파도 같은 날들이 철썩이며 지나갔다

    지금, 누가

    남은 하루마저 밀어내고 있다

    가고픈 가지 못했고

    보고픈 사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생활이란 그렇다

    다만, 밥물처럼 끓어 넘치는 그리움 있다

    돋아난 초저녁별에 묻는다

    평화가 상처와 고통을 거쳐서야

    이윽고 오는지를 ...

    지금은 세상 바람이 별에 닿는 시간

    초승달이 먼저 ,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세모 이야기  /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깊고 눈동자가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 어느 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이리 찬가 묻기에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돋은 무우을 다듬고 계실 어둔 어머님을 위해

    세모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일까

     

    문경 새재 산막 곁에 구워 팔던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소년의 염원이 멎어 있는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얼마나 다숩게 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 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의 체온으로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은 소생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세모에 어느 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끼리 인천바다 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 끼던 말없는 표정들처럼

     

    나도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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