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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관한 시모음<1> [겨울 시]시모음 2022. 12. 8. 18:43
겨울에 관한 시모음<1> [겨울 시]
겨울이 그려준 하얀 보고픔 / 오광수
밤새 소복 소복 하얀 눈이 내려
보고 싶은 당신 모습을 그렸습니다.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큰 줄
알고
온 세상이 다 보도록 크게 그렸습니다.
어제까지 길을 막던 저 언덕은
오뚝한 당신의 코가 되었습니다.
처량해
보이던 마른 풀들도
오늘은 당신의 머리카락입니다.
유난히 큰 까만 눈은 아니어도
수줍어 속눈썹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환하게 미소띤 얼굴은 아니어도
내가 좋아 쳐다보던 그 모습입니다.
조용히 부는
눈바람은
당신이 나를 향한 속삭임 같고
앙상하여 볼품없었던 나무들도
당신의 손에 들린 하얀 꽃송이
같습니다.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아는 하늘은
내 가슴에 새겨져 있는 모습과 같이
간밤에 그렇게 그렸습니다.
하얗게
그리움으로 그렸습니다.
겨울산 / 황지우
너는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겨울 산에서 뉘우치다 / 안도현
이 세상을 점점이 묘사하며 내리는 눈송이
이 풍경 한쪽 구석에다 내 이름 석 자 쓰고
붉은 낙관이나 하나 꽝, 찍어 버려?
너, 이 도둑노옴!
무엇을 더 가지겠다는 거냐?
내 이마를 후려치고 가는 눈발의 회초리
내 마음 문득 어둬 산수유 열매 붉어라
겨울 담쟁이 / 정찬일
저 수많은 잔뿌리 좀 봐
담쟁이가 꿈속을 오르고 있어
길 한 모퉁이 콜타르 먹인 판자를 차고 하늘 오르는 담쟁이 좀 봐
판잣집도 오래 견디다 보면 잔뿌리 내리며 담쟁이가 오르고 있어
오르는 일만으로도 한생애를 다 보낼 수 있겠군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는지 몰라
수맥이 다 마른 담쟁이의 아랫도리
그 아래로 하교길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어릴 적 울음소리도 가끔씩 들려
내게도 길이 있었지
무심히 자란 계절의 그림자를 다 떨치고
딱딱한 겨울 햇살 속으로
푸른 실핏줄을 다 드러낸 담쟁의 길
불량한 겨울바람이 지나다가 툭 건드리면
줄기 끝으로 치올린 생장점들이 잠에서 막 깨어나
한 계절 파랗게 터뜨려버릴 것 같은 담쟁의 길
겨울 밤 / 김기택
넝마와 깨진 플라스틱, 썩은 음식마다
불꽃들은 튼튼하게 뿌리박고 피어 있네
귀찮았던 무게들이 이렇게 뜨거웠었구나
고약했던 냄새들이 이렇게 환했었구나
남김없이 불을 빼내고도 여전히 차가울 공기 속에서
불을 다 삼키고 나면 더욱 튼튼해질 어둠 속에서
겨울 저녁의 시 / 남진우
저녁마다 우리 집엔
안개와 함께 낯선 손님이 찾아온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는 먼 나라의 이상한 소식을 하나씩 전해준다
철새들이 가로지르는 텅 빈 하늘엔 간혹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지평선을 푸르름을 지우며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한 것들이 모두 땅거미 속으로 스며들고 나면
아무도 없는 집은 정적으로 붐빈다
겨울, 대지의 관이 닫힌다
서리 내린 길 위를 허기진 개들이 어슬렁거린고
해시계는 더 이상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키지 않는다
죽은 자의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다가오는 빙하기의 어둠
흰 눈송이들이 물려와 내 의식의 빈터에 쌓이는 밤
나는 유리창 옆에 서서
어둠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지켜본다
겨울 포구 / 장석남
잎 가지지 못한 삶이 서 있고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길 위로
밭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다
포도나무는 밭을 포도밭으로 만들고 있지만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이 와도
빈집들은 이 마을을
빈 마을 이외로는 만들지 못한다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겨울 포구
겨울 편지 / 안도현
당신,
저 강을 건너야 한다면
나, 얼음장이 되어 엎드리지요
얼음장 속에 물고기의 길이 뜨겁게 흐르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는 당신이 출렁이고 있으니까요
겨울 한라산 / 정호승
맹인들이 한라산을 오른다
흰 지팡이를 짚고 눈 속을 헤쳐
한라산에 사는 백록을 만나러 간다
한란의 꽃줄기 같은 안마사 김도
하모니카를 불며 하루종일 지하철을 떠도는 김씨도
국립서울맹학교 국어교사 박 선생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한라산을 오른다
눈 밟는 소리가 맑다
바람을 타고 눈발이 흰 지팡이를 따라 밝게 사선을 긋는다
나는 잠시 그들의 발 아래 눈처럼 밟힌다
밟힌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때는 처음이다
어리목에서 내려온 노루들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
어느새 성산포가 뒤따라 올라온다
백록이 서둘러 걸어 내려와 손을 잡는다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다 보인다
겨울 강변에서 / 문인수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겨울로 가는 마을 / 최하림
가을이 저물 대로 저물어 꼭지가 떨어지고 나면
돌담의 맨드라미와 피마자들은 색깔을 잃어버리고 뒤안 우물도 말라붙어 소리를 죽인다
추수를 끝낸 농부들은
쇠스랑과 쇠갈퀴 써레 괭이들을 헛간에 가지런히 넣고 빗장을 지르고 나서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네거리로 나간다
여인들도 그림자를 끌고 마당을 지나간다
시월과 십일월은 잠시 숨을 죽이고 골목을 빠져 나간다
검은 까마귀들이 날개를 치며 논두렁에 내려앉다가 올라간다
아이들이 동구길에서 아우성친다 머리가 파르스름한 사미승이
논두렁 건너 소나무 숲길로 걸음을 재촉하며 간다
아직도 한 뼘쯤 해는 서산에 남아 있고
네거리에서 사람들은 넘어가는 해를 일없이 보고 있다
겨울 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 번 열지 않고
반추 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겨울편지 /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35>
겨울풀 / 이근배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겨울 양수리 / 목필균
낯익은 그림자 하나
눈을 맞으며 서있다.
그는
여름부터 앓고 있던 양수리가
서서히 소생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움이란 무심한 세월도 잊고
선명한 빛깔로 일어서는 것.
잊혀질 시간마다 나타나서는
베어진 상처로 피를 보이며
강의 흐름을 타고 있다.
강으로 달려온 겨울은
거대한 얼음덩이를 안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울고 있는데.
머무를 곳 없는 사람은
제 그림자를 안고 서있다.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나무 / 이윤학
잃어버림을 곰곰히 생각하는 중이다
체중 조절을 위해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는 중,
갈수록 둔탁한 소리가
관절 사이를 옮겨다니며 일상을 괴롭힌다
오늘에야 부끄러움도 제 얼굴로
익숙하다 제 살을 제 몸으로 부딪치며
다시 떠보일 눈을 감고 있다
가늘고 긴 겨울,
뚜렷한 획을 긋고 있는
침묵의 힘이며
이 겨울에 / 김남주
한파가 한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는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듬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삭풍에 눈보라가 쳐서 살이 터지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그 나무 몸집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상수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낸 척후병으로 서서
싸리나무 옻나무 너도밤나무와 함께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밤에는 하늘가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겨울 강가에서 / 목필균
눈이 내린다
어지럽게 내려오는 눈발이
부옇게 아침을 몰고 온다
하얗게 덧칠된 풍경
강은 말없이 눈을 삼킨다
툭툭 떠오르는 기억들이
생각의 갈래를 하나로 묶는다
먹어야 할 끼니를 마련하듯
하루치 슬픔이 내 앞에 엎드린다
쉽게 잊혀질 줄 알았던
내 쓰린 사랑이 살얼음으로 얼려진 강
겨울에 / 김지하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다시 겨울 아침에 / 이해인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겨울밤 / 오세영
창밖에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방안의 나는
열에 까무러치며
망연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오늘같이 포근하게 추운 날에는
꿩, 비둘기, 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틀고 있겠지요,
꿩 가족은 아마 아빠가 따온 빨간
산수유 열매를,
다람쥐 가족은 아마 엄마가 물어온 노오란
도토리 열매를
도란도란 까먹고 있을지 모릅니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데
방안에는 촛불 하나 가물가물
이우는데
땀에 혼곤히 젖은 나는 열에서 막 깨어나
가만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어쩐지 당신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꿩, 비둘기, 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트는
겨울밤,
창밖에는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
겨울 나기 /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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