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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시 모음... 나태주 외 10편
    2022. 11. 1. 11:17

     

    11월 /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 -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11월 - 박용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1월 - 황인숙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1월 /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11월 / 나희덕

     

     

    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1월 / 장석주 

    이미 떠난 사람 다시 떠난다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 결국 떠난다

    등불은 야위어가고
    저 들에 바람은 사나워지리
    빈 들에 지는 잎새마다 노을이 뚝, 뚝, 진다

    치과병원에서의 기다림은 無痛性이다
    그러나, 보라
    모든 기다림엔 통증이 따른다
    뿌리째 흔들리는 치아 몇 개를 뽑아버리고
    어떤 삶도 무통 분만이 아님을 알아버린 그대

    구릉 너머로 파렴치한 백주의 빛 사라지고
    황토 언덕 키 낮은 소나무들 그림자가 길어진다

    새로 오는 저녁은 전무후무한 저녁이다
    일체의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돌연 그대의 삶은 보다 가벼워진다

    문득 모과나무가 마지막 잎새를 떨구고
    빈 몸 될 때
    희망때문에 보다 암담해졌음을 안 그대
    덧없는 창을 닫는다
    세계는 보다 완벽한 어둠 속에 있게 된다

    이미 세상 버린 사람 다시 세상 버린다
    차마 세상 버리지 못한 사람 결국 세상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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