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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에 관한 시 모음<1>시 2022. 11. 2. 11:24
단풍에 관한 시 모음<1>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붉은 잎 /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ㅁ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 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내손 안의 단풍 / 이외수
청명한 하늘에
발목 적시며
먼 길을 떠난 그대
초 가을 이별은 아무리 길어도 일 주일
짤막한 엽서 한 장에도
내 손바닥 먼저 단풍 들었네
단풍 / 복효근
저 길도 없는 숲으로
남녀 여남 들어간 뒤
산은 뜨거워 못 견디겠는 것이다
골짜기 물에 실려
불꽃은 떠내려오고
불티는 날리고
안 봐도 안다
불 붙은 것이다
산은,
단풍과 나 / 정연복
차츰차츰 곱게
단풍 물드는 잎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지만 말자.
저 많은 잎들은 빠짐없이
생의 절정으로 가는데
나는 이게 뭐냐고
기죽고 슬퍼하지 말자.
한 하늘 하나의 태양 아래
또 같은 비바람 찬이슬 맞으며
지금껏 하루하루 살아온
나무와 나의 삶인 것을.
이제 고운 빛 띠어 가는
나무의 한 생이라면
내 가슴 내 영혼 또한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 가리.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 정유찬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단풍 / 나태주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빛이여 들어와
조금만 놀다 가시라
바람이여 잠시 살랑살랑
머물다 가시라.
단풍나무 한 그루 /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 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뻘건 단풍 (전라도풍으로) / 오세영
누가 저렇고롬 뻘건 물감을
찌끌어 놓았다야
천지 사방 불붙었당께
어쩐당가.
이녁 피지 못해
퇴깽이, 여시 묏도야지.....
몽땅 불괴기 되겠시야.
오매 징한 것.
산신령 을마나 배고팠으면
꾀복쟁이 아들 콩서리하듯
늦가을 원 산 거시기 한다당가.
성냥개비 긋듯
환쟁이 화판에다 붓끝 찍찍 그어
윗다 왼통
불붙여 놓았소잉.
단풍나무 아래서 /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닳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가을 단풍 / 용혜원
붉게 붉게 선홍색 핏빛으로 물든
단풍을 보고 있으면
내 몸의 피가
더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 잎사귀가 어떻게
이토록 붉게 물들 수가 있을까
여름날 찬란한 태양빛 아래
마음 껏 젊음을 노래하던 잎사귀들이
이 가을에
이토록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을 다 못 이룬 영혼의 색깔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한순간이라도
이토록 붉게 붉게 타오를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사랑일 것이다
떨어지기 직전에 더 붉게 물드는
가을 단풍이
나에게도 사랑에 뛰어들라고
내 마음을 마구 흔들며
유혹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단풍 / 유치환
신이 주신
마지막 황금의 가사를 입고
마을 뒤 언덕 위에 호올로 남아 서서
드디어 다한 영광을 노래하는
한 그루 미루나무
단풍 / 반기룡
해마다
색동옷 입고
파도타기를 하는 듯
점점이 다가오는 너에게
어떤 색깔을
선물해야 고맙다고 할까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가을비 소리 /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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