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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시 2022. 12. 9. 18:0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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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시 2022. 12. 9. 17:41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이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 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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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 / 이진흥시 2022. 12. 9. 17:32
어떤 풍경 / 이진흥 당신이 산이라면 나는 강, 나는 당신을 넘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건너지 못합니다. 천년을 내게 발을 담근 채 당신은 저 건너에만 눈길을 두고, 만년을 당신 휩싸고 돌며 나는 속으로만 울음 삭였습니다. 그렇게 세월 지나 당신의 능선 위로 별빛 기울고 나의 물결 위로 꽃잎 떨어져 당신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주검 돌아보니 산은 첨벙첨벙 강 속으로 들어가고 강은 찰랑찰랑 산의 허리 감싸 안고 흘러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잊어버리고 푸른 하늘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새들 바라보며 골짜기에 보얗게 안개 피워 올리는 그런 풍경이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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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묵시록 / 이명희시 2022. 12. 8. 20:18
겨울 묵시록 / 이명희 조금 더 넓어지기 위한 비움의 시간 속에서 아득한 공간을 밟고 가는 쓸쓸함 더는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마냥 침몰해가는 나의 저녁 침묵으로 꽁꽁 묶여 눈물로도 건널 수 없어 당신께 엎드려 있는 등 시린 아픔 길 끝에 이르러서야 더 이상의 슬픔은 욕심이라는 말씀 호되게 듣습니다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오롯이 하나가 될 수 없어 마음 가득 사랑을 품고도 홀로 가는 길 사뭇 쌓인 긍정이란 이름으로 몸을 풉니다 어깨위 촉촉이 내리는 안개 같은 평화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외로움도 행복이라고 억지를 쓰는 가슴 사랑으로 쓸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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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편지 / 박세현시 2022. 12. 8. 20:14
겨울편지 / 박세현 첫 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 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