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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가을에서야 / 이해인 [가을 시]시 2022. 11. 21. 22:13
내 나이 가을에서야 / 이해인 [가을 시] 젊었을 적 내 향기가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 바래고, 향기도 옅어 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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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고 싶어요 / 김용택시 2022. 11. 15. 16:25
늘 보고 싶어요 / 김용택 오늘 가을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 간절했습니다 산의 품에 들고 싶었어요, 깊숙이 물의 끝을 따라 가고 싶었어요 물소리랑 당신이랑 한없이 늘 보고 싶어요 늘 이야기하고 싶어요 당신에겐 모든 것이 말이 되어요 십일월 초하루 단풍 물든 산자락 끝이나 물굽이마다에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가슴 저렸어요 오늘 가을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하루 왼종일 당신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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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뒤돌아보면 / 조철형시 2022. 11. 15. 14:49
언젠가 뒤돌아보면 / 조철형 바람 부는 날에 길을 떠난 이는 돌아보지 않는다 가슴에 가득 찬 아쉬움이 눈물 되어 앞을 가리면 길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길이 안 보여도 바람 부는 때 달려가야 한다 바람 부는 날에 멈추면 영영 더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하여도 가지 않으면 또다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먼 훗날 하얗게 외로운 길에서 홀로 서러운 눈물 흘리더라도 가야 할 때는 가야 한다 언젠가 길의 끝에서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헛헛한 웃음 짓게 되더라도 바람 부는 날에 떠나야 한다 삶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용솟음칠 때는 바람부는 날에도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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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시 2022. 11. 15. 14:37
또 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 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