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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가에서 1 / 전병조시 2022. 12. 14. 16:36
겨울강가에서 1 / 전병조 겨울강가에 서면 빛이 가난하여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 썰매를 탄다 은어의 날개 위에 반짝이는 불임(不姙)의 삶, 프리즘을 통하여 복제된 시작과 중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안달난 일상들이 자꾸만 미끄러지며 썰매를 탄다 어젯밤 꿈이 현실적 전망으로 바뀌고저 오늘로 이월시킨 이 손때 묻은 하루 허리가 휘어지고 거품이 굳도록애 휘저어도 내일이 없는 이 천막같은 하루 라면을 끓이다가 문득 불어오는 찬바람에 두 손을 데어버린 먹다남은 일상들이 뱃머리를 중심으로 팽그르르 맴을 돈다 겨울강가에서 2 이별이란 그리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바람 속에 흩어지는 먼지의 일상일 뿐 너 멀리 보내고 항시 가슴 아파했던 것은 그리움이 아니라 한 조각 굳어진 체념의 눈물이었다 날마다 침몰하며 침묵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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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우리 만나리 / 김영근시 2022. 12. 13. 18:35
눈처럼 우리 만나리 / 김영근 눈처럼 우리 만나리. 삶에도 겨울이 있으니 마음이 추워지면 서로의 손을 잡고 삶의 추위를 녹이리. 눈처럼 우리 만나리. 어둠이 짙어지고 찬바람 매섭게 부는 날 꿈이 흔들리고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들 때 서로를 향한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따뜻하게 서로를 부둥켜안으리. 눈처럼 우리 만나리. 삶의 봄이 언제 올지 모를 가난한 시기에는 아담한 텃밭에서 만나 호미와, 괭이 들고 서로를 위한 꿈의 씨앗을 뿌리리. 눈처럼 우리 만나리. 서로의 가슴 속에서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질지언정 서로를 위한 사랑의 존재가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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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시 2022. 12. 9. 18:0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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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시 2022. 12. 9. 17:41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이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 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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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 / 이진흥시 2022. 12. 9. 17:32
어떤 풍경 / 이진흥 당신이 산이라면 나는 강, 나는 당신을 넘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건너지 못합니다. 천년을 내게 발을 담근 채 당신은 저 건너에만 눈길을 두고, 만년을 당신 휩싸고 돌며 나는 속으로만 울음 삭였습니다. 그렇게 세월 지나 당신의 능선 위로 별빛 기울고 나의 물결 위로 꽃잎 떨어져 당신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주검 돌아보니 산은 첨벙첨벙 강 속으로 들어가고 강은 찰랑찰랑 산의 허리 감싸 안고 흘러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잊어버리고 푸른 하늘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새들 바라보며 골짜기에 보얗게 안개 피워 올리는 그런 풍경이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