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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보내면서] 가을에 관한 시모음<5>시모음 2022. 11. 9. 17:41
[가을을 보내면서] 가을에 관한 시모음<5>
가을 / 오세영
우리 모두
시월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 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의 가을.
시월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가을이 가네 / 용혜원
가을이 가네 내
가슴에 찾아온 고독을
잔주름 가득한 벗을 만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함께 나누려는데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세파에 찌든 가슴을 펴려고
여행을 막 떠나려는데
야속하게 기다려주지 않고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내 인생도 떠나야만 하기에
사랑에 흠뻑 빠져들고픈데
잘 다듬은 사랑이 익어가는데
가을이 가네 주말 내장산
낙옆지는 단풍을 보고
가을, 아득한 / 마종기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화가 마티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茶毘)에 부쳐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 냄새 가볍게 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나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가을 서한 1 / 나태주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가을 서한 2 / 나태주
1,
당신도 쉽사리 건져주지 못할 슬픔이라면
해질녘 바닷가에 나와 서 있겠습니다
금방 등 돌리며 이별하는 햇볕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햇볕들과 두 번째의 이별을 갖기 위하여
2,
눈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한 겹씩 옷을 벗고 나서는 구름
멀리 웃고만 계신 당신 옆모습이랄까?
손 안 닿을 만큼 멀리 빛나는 슬픔의 높이
3,
아무의 뜨락에도 들어서보지 못하고
아무의 들판에서 쉬지도 못하고
기웃기웃 여기 다다랐습니다
고개 들어 우러르면 하늘, 당신의 이마
4,
호오, 유리창 위에 입김 모으고
그 사람 이름 썼다 이내 지우는
황홀하고도 슬픈 어리석음이여
혹시 누구 알 이 있을까 몰라 ...
가을에 보내는 편지 / 탁정순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붉게 물든 숲마다 들꽃의 노래와
풀벌레 소리 정겨운 이 가을을 사랑한다
가을이 노랗게 익어갈수록
감사함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덕망있는 그대를 사랑한다
비록 투명한 수채화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스스로 덧칠할 줄 아는 삶의 진솔함으로
화려한 유화 한점 남길 수 있는
열정의 그대를 사랑한다
가을 속에는 허와 실이 함께 존재하지만
비애도 자랑도 아니 하며
맑고 푸른 하늘보며 감사의 기도를
죽어가는 슬픈 영혼에도
한때는 성실과 노력의 땀방울이었노라며
위로할 줄 아는 따뜻한 그대를 사랑한다
잘났든 못났든 가리지 않고
함께 섞이어 퇴색되어가는 낙엽처럼
세상을 둥글둥글 껴안으며
비울줄 아는 희생의 그대를 사랑한다
이 가을, 젊은 날의 그대를 갈망하며
봉선화 꽃 물들이고
그리움에 미소짓는 가을밤이면 좋겠다
가을 풍경 / 목필균
허수아비가 분신술을 썼는지
참새를 쫓는 지, 멧돼지를 쫓는지
논에도 있고, 밭에도 잠들지 못하고 섰다
툭툭 떨어지는 밤을 줍는 등 굽은 할아버지
망친 끝물고추 거두는 할머니 투박한 손끝에
고추잠자리 잠시 머물다 날아간다
바짝바짝 목마르던 봄 가뭄도
이마가 소금밭이 되는 여름 뙤약볕도
쓸데없이 쏟아지는 늦장마도
여물어 단단한 결실을 내놓은
풍성한 가을이 되기 위한 통증인 것을
가물가물한 하늘과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사이에
코스모스 무리지어 흔들리고 있다
가을엔 이렇게 살게 하소서 / 이해인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 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하소서.
사랑 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 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가을은 남은 거에 / 조병화
가을은 사랑의 거리를 좁혀 주었읍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나로 모아 주었읍니다
나뭇잎은 떨어져서
大地를 덮고
텅빈 자리
가을은
남을 것이 남아서
가득히
시간을 더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 ! 나는 한번도
당신을 본 일이 없읍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다시 사랑을 보는 눈을
돌려 주셨읍니다
그리고, 다시
먼 곳에서 혼자
사랑을 아파하는 가슴을 돌려 주셨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 뜻대로
가을에 남았읍니다
그리고, 떨어진 곳에서
사랑을 보고 있읍니다
그리고, 알맞게 자리 잡은 곳에서
사랑을 듣고 있읍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 주신 그 생명으로
얼만큼 더
가을을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는 한번도
당신을 본 일이 없읍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떨어진 가을잎새 되어
내 곁에 있읍니다
가을은 보여 줄 것을
보여 주고 있읍니다
그리고
생각할 것을
생각게 하여 주고 있습니다
가진 자에게 그만큼 가난함을
없는 자에게 그만큼 풍부함을
그리고
무성한 자에게 그만큼 조락을
주님 ! 나는 한번도
당신을 본 일이 없읍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가을잎새 되어
비속에, 혼자
나뭇가지에 있읍니다
가을나무 / 최송연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빗물처럼 흐르는 들녘 ...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서걱거리며 흐느끼는 억새 소리
먼 길을 걸어온 生의 탄식이런가...
그대,
봄, 여름, 가을,
그렇게...
온 몸의 진액 긁어모아
알알이 영근 열매
생명으로 나누어 주었건만
이젠
나뭇잎조차 지탱하기 어려워
모두 떠나 보내야만 합니까
그러나 그대여,
오늘 떨어지는 낙엽을
슬퍼하며 울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는
화사한 마음 되어 위를 향해
두 손을 힘껏 뻗어보세요
하늘은 언제나 거기 있답니다
하늘과 함께 춤추며
서릿발 모진 된서리를 견뎌 낼
준비라도 착실히 하며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노라면
잎새 모두 떠나버린 가을이라 하여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다
가을 단상 / 용혜원
단 하나의 낙엽이 떨어질 때부터
가을은 시작되는 것
우리 가슴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거리로 나서고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낙엽과 함께 날리며 갑니다
사랑은 계절의 한 모퉁이
공원 밴치에서 떨리는 속삭임을 하고
만남은 헤어짐을 위하여 마련되듯
우리의 젊은 언어의 식탁엔
몇 가지 논리가 열기를 발산할 것입니다
가을이 푸른 하늘로 떠나갈 무렵
호주머니 깊이 두 손을 넣은 사내는
어느 골목을 돌며 외투 깃을 올리고
여인들은 머플러 속에 열굴을 감추고 떠날 것입니다
모든 아쉬움은 탐스런
열매들을 보며 잊혀가고
초록빛들이 사라져갈 무렵
거리에는 빨간 사과가 등장할 것입니다
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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