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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보내면서] 가을에 관한 시모음<6>시모음 2022. 11. 9. 17:56
[가을을 보내면서] 가을에 관한 시모음<6>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 김재진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걷고플 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 다 사랑하고 싶어라.
가을, 그리고 그리움 / 최정희
가을은 소리없는 바람으로 내게 와서
잊혀져간 추억 한 자락 살며시 안겨주네
말갛던 마음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평온한 내 영혼도 파도처럼 출렁이네
아 아 스쳐간 날들이 가슴 아리게 그리워라
입가에 미소가 아름답던 사람이여
가슴에 사랑이 가득하던 사람이여
아련한 그 모습 잊혀진 줄 알았는데
바람 부는 가을날엔 그대 그리움에 서성이네
가을에 읽는 시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다시 가을 길에서 / 이명희
냉혹한 삶 끝에 절인 김이 빠진 군상들
굴레 같은 오솔길 저희끼리 부대끼며
바람 속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떠난다
너 때문에 눈이 부셔 꿈같았던 설렘도
계절의 뒷자락에 마냥 누운 쓸쓸함에
허기를 느끼는 결핍 마음 한쪽 쓸고 간다
한껏 몸은 낮춘 눈썹 젖은 슬픈 낮달
천리 허공 헤매며 세월을 거슬러온
얼룩진 순간순간들 적막 속에 깃을 친다
또, 가을이 / 홍수희
세월이야
가는 줄 아주 가는 줄만
알았는데 가을이
또, 가을이 왔습니다.
이제 창밖에 낙엽이 지면
나는 또
당신께 가 닿지 못하는 쓸쓸함으로
어느 때 보다도
가슴이 뭉텅뭉텅 아리겠지요.
몸밖을 떠도는 그리움
갈 곳이 없이 가을이
또, 가을이 가겠지요.
지금 다시 가을 / 김남조
다시 가을입니다
긴 꼬리연이 공중에 연필그림을 그립니다
아름다워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가을엔 이별도 눈부십니다
연인들의 절통한 가슴앓이도
지금 세상에선 수려한 작품입니다
다시 만나라는 나의 축원도
이 가을엔 진심이 한도에 닿은듯 합니다
그간에 여러 번 가을이 왔었는데
또 가을이 수북하게 왔습니다
이래도 되는지요 빛 부시어 과분한거 아닌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복입니다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 이외수
서늘한 기운에 옷깃을 여미며
고즈넉한 찻집에 앉아
화려하지 않은 코스모스처럼
풋풋한 가을 향기가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을 마주하며
말없이 눈빛만 바라보아도
행복의 미소가 절로 샘솟는 사람
가을날 맑은 하늘빛처럼
그윽한 향기가 전해지는 사람이 그립다
찻잔 속에 향기가 녹아들어
그윽한 향기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사람
가을엔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다
산등성이의 은빛 억새처럼
초라하지 않으면서 기품이 있는
겉보다는 속이 아름다운 사람
가을엔 억새처럼 출렁이는
은빛 향기를 가슴에 품어 보련다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 이해인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 /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이 가을에 / 이수인
이 가을에
그리운 얼굴 하나 없는 사람은 슬프다
가을이 오면 오랜 기다림 속에
피어난 해바라기처럼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가을이 깊어 발 밑에 뒹구는 낙엽 속에서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히고 사는 사람이다
이 가을에 간절한 바람처럼
보고 싶은 얼굴 하나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스산함 저 뒤편에
따스한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힌다
가을을 보내며 / 목필균
11월 끝자락에 귀울림이 열린다
뜬금없는 휘파람 소리
다 비워버린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휘파람 소리
여운이 길다
하늘이 낮게 엎드리고
찬바람 휘돌아가는 저녁
플라타나스 너른 잎새가
갈색으로 부서진다
바스락 바스락
건조한 얼굴과 가슴과
바람과 눈물이 부서진다
곁을 떠난 것들이
손짓해도 돌아올 리 없는데
휘익 휘익 휘익
낯선 휘파람이 감출 새 없이
터져 나온다
가을 소리 / 박노해
가을은 투명해 가는 백합나무 잎에서 온다
살며시 고개 숙인 들녘의 벼에게서 온다
마당 가에 빨갛게 말라가는 고추에서 오고
서로 어깨를 기대인 참깨 다발에서 오고
조금씩 높아지고 맑아지는 하늘빛에서 온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며
붉은 볼로 빛나는 대추알과 사과알에서 온다
봉숭아 꽃씨 매발 톱 꽃씨 그 작은 씨앗들이
토옥톡 멀리 퍼져 흙 속을 파고드는
소리 없는 희망의 분투에서 온다
그리고 가만가만 생각에 잠긴 너
조금은 쓸쓸하고 슬퍼지는 마음에
세상의 미약한 노래들과 다른 목소리들과
가슴에 묻어둔 말들이 메아리 쳐 오는
가을은 너에게로 마주 걸어온다
가을이 오는 소리
고요해진 내 마음에 울려오는
가을 소리
가을의 문턱에서 / 김보일
무엇에 지칠 만큼 지쳐보고서
입맛을 바꾸어야지,
무엇을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이거저거 집적대는 것은
자연(自然)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초록이 지쳐 단풍든다는 말이
자연의 이치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말은 아닐지.
영과후진(盈科後進),
물은 웅덩이를 다 채우고 흘러간다던가.
지칠 만큼 여름이었고,
벌레들은 제 목청을 다해 울었으니
이제 가을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가을일 것이다.
가을 욕심 / 정용철
지금쯤 전화가 걸려오면 좋겠네요
그리워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이라도
한 번 들려주면 참 좋겠네요.
지금쯤, 편지를 한 통 받으면 좋겠네요.
편지같은 건 받을 상상을 못하는 친구로부터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한 통 받으면 참 좋겠네요.
지금쯤,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참 좋겠네요.
귀에 익은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와
나를 달콤한 추억의 한 순간으로
데려가면 참 좋겠네요.
지금쯤, 누군가가
내 생각만 하고 있으면 참 좋겠네요.
나의 좋은 점, 멋있는 모습만 마음에 그리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 참 좋겠네요.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 이준관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황토흙 얼굴의 농부들이
아픈 소는 다 나았느냐고
소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낯모르는 내 손에
고향 불빛 같은 감을
쥐어주기도 한다.
콩과 팥과 고구마를 담은 보따리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껴안고 가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귀에 정겹다.
창문 밖에는
꿈 많은 소년처럼 물구나무선
은행나무가 보이고,
지붕 위 호박덩이 같은 가을 해가 보인다.
어머니가 싸주는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 버스.
사람이 못내 그리울 때면
문득 낯선 길가에 서서
버스를 탄다.
하늘과 바람과 낮달을 머리에 이고
가을 앞에서 / 박기원
이쁜 것은 이쁜 것대로
미운 것은 미운 것대로
모두 제 모양대로 그렇게
익어가는 가을이라.
함부로 뉘게도 건느지 말라
통채로 바친들 아까울게 있으랴
하늘보다 더 높은 사랑의 이치며
바다빛보다 짙은 이별 얘길랑은.
아침에 떨어진 진한 잎새며
간밤에 피어난 들국화송이란
아프게 인연한 피 맺힌 곡절도
물을데 없는 텅 빈 이 공간에서.
너로하여 맷히는 이슬 방울인가
점점이 옷자락 아롱지는 마음
가지 끝에 쉬었다가는 솔바람속에
뼘 만큼 재 보는 나의 고독(孤獨)아.가을 하늘을 보자 / 유승희
삶이
고달파 울고 싶을 때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얼굴들이 보고 싶을 때
어릴 적
소꿉동무 지금은 어디 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 궁금할 때
가슴 속 똬리 틀고 있는
알 수 없는 그리움 하나
언제 만나지려나 기다려질 때
문득문득
내 생애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
행여,
쓸데없는 허욕을 부리며
과한 욕망의 사슬에
나를 묶어 두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갈 때
너무 이기적으로
내 안의 것들만 챙기느라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나 반성을 하면서
그래, 가끔은
빨간 잠자리 높이 날고
뭉게구름 둥실 떠가는
눈부시도록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보자.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이 가을에 보고 싶다/안희선
향기로운 죽음을 닮은.붉은 노을
고단한 삶의 모든 슬픔과 아픔도
석양의 고요한 품에 안겨,
깊은 안식의 세계로 향하고
나에게 숙명 같은
하나의 그리움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 석양과 함께 지워졌을 것을
아,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리움 하나
이 가을에 보고 싶다
내가 지워지기 전에'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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