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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새에 관한 시모음<1>
    시모음 2022. 11. 3. 20:32

     

    억새꽃 / 오세영

     

    흐르는 것 어이 강물뿐이랴.

    계곡의

    굽이치는 억새꽃밭 보노라면

    꽃들도 강물임을 이제 알겠다.

    갈바람 불어

    석양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일렁임,

    억새꽃은 흘러흘러

    어디를 가나.

    위로위로 거슬러 산등성 올라

    어디를 가나.

    물의 아름다움이 환생해 꽃이라면

    억새꽃은 정녕

    하늘로 흐르는 강물이다.

     

    억새풀의 고향 / 이원문

     

    다랑이논의 논 둑으로 밭 둑으로

    그 억새풀 없는 곳이 어디에 있겠나

    욕심의 풀 한 줌에 가을을 모르고

    손 베일까 긁힐까

    귀찮게 베었던 그 억새풀이었는데

     

    그 봄날에 여름이면

    조심스레 꼭 잡아  베었던 풀이였고

    이 가을날 하얀히 하얀 꽃으로

    그 억새꽃 잊으며 살아온 타향인가

    이제야 그 하얀꽃 다시 쓸어 안어 본다

     

    옛 기억 더듬어 처음 쓸어 안어 보던 날

    부끄럽던 그 느낌을 어떻게 말을 할까

    지금은 그 억새꽃에 마음 빼앗기고

    추억에 남아 있는 아련한 그리움까지

    그 시절 찾고 싶어 다시 쓸어 안어 본다

     

     

    억새 2 / 조남명

     

    잎사귀 서슬 퍼렇던

    억새

    삭풍을 거역 못하고

    다소곳 누웠다

     

    찬바람에 시달려

    늘어트린 풀죽은 이파리

    들릴락 말락 서걱거리는 소리

     

    언덕에 기대 누워

    빛바랜 허연 머리칼

    고개 숙이는 초라한 풀

     

    솜털 씨앗 흩어져 나가고

    빗살만 하늘을 쓸고 있다

    그 권세 어디 갔는가

     

    하늘 억새 / 박종영

     

    산을 오르다 보면 억새는

    언제나 산을 향해 머리를 푼다

     

    은빛 웃음으로 조아리는

    한 움큼 이별의 말씀,

    산 위로, 산 위로만 올려보내는 춤사위

     

    풍경 한 폭 멈춰선 산허리 어디쯤,

    큰 고요가 서러워서

    저토록 머리 풀고 이별을 손 흔드는 것인가?

     

    산굽이 돌아 바라만 봐도 오싹해지는

    , 초록 물빛 선선한 바람따라

    동동하게 여문 가을 들녘,

     

    무더위 밀어내고 일어선 황토길에

    보송보송 목화송이 하르르 하얀 웃음 흩날리고,

    덩달아 나도 하얗게 흔들리고.

     

     

    억새 풀 / 박인걸

     

    억새는 칼날을 곤두세우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며

    잠 못 이루며 서걱 인다.

    방황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며

    빳빳한 마음가짐으로

    영혼에 푸른 문신을 새기고

    脫胎를 다짐했건만

    폭풍이 나무를 뽑던 밤

    숲이 목 놓아 울 때

    푸른 억새의 다짐은

    하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날부터 억새는

    억세게 살기로 다짐했다.

    바람에 흔들릴 지라도

    꼬꾸라지지 않으며

    산짐승에 짓밟힐지라도

    쓰러지지 않으리라.

    입에 문 예리한 칼날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낼지라도

    검은 피를 내 뱉으며

    짙푸른 옷에 풀을 먹이고 있다.

     

    억새 밭 / 나상국

    노을빛으로 불타는 저녁
    하늘과 맞닿은 산비탈
    바람이 목놓아 울고 간 자리마다
    칼에 베인 핏빛 생채기가
    억새밭 여기저기
    잠 못 이루고 펄럭인다
    새들은 몸을 숨긴 채
    붉은 노을빛 하늘을 조각조각
    베어 문다
    상처 입은 바람
    해거름 녘 강둑으로 내려와
    몸을 씻으며 낮게 엎드려
    강울음 소리로
    숨죽여 운다
    어둠이 찾아드는 저녁에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이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이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

    내 생에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억새 / 홍수희

    그리워도 그립다 말하지 않네
    보고파도 아닌 체 먼 산만 보네

    기다리다 돌아서면 등뒤에 서서
    눈물처럼 하얗게 손짓만 하네

     

     

    억새꽃 / 구재기  
     
    나는 아직도 매일처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피었다 진다

    흔들리는 나의 작은 가슴에 가득
    소리 없는 꽃잎으로 피었다 진다
     
    반도의 땅 산비알 밭둔덕에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땀을 흘릴지니

    새하얀 억새꾳, 피면서 흔들리어라
    메마른 억새꾳, 지면서 흔들리어라

    어머니 묻힌 산기슭을 돌아 내려오노라면
    달은 무서리에 더욱 푸르러지고
    바람은 무서리에 더욱 거칠어 지나니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뿌려라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두 눈을 감았다 뜨리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나는 또 피었다 진다

     

    신불산 억새 / 오광수

     

    낮은 심장으로 앉아있는 호흡에게

    소리는 침을 가득 묻혀 길을 내었다

     

    그 길을 따라 내 누이가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같이

    꿈에라도 왔다 갔으면 싶은 내 어머니의 발걸음같이

    눈물에게는 희미한 하늘을 만들고

    보고픔에는 가슴에서 불러보는 손짓을 만들어

    앉아있어도 신불산 억새에게 업혀서 가고 있다

     

    그냥 이대로 가만가만 살았으면,

    그리고 작은 심장만이라도 따뜻했으면,

    대답을 흩어버리는 바람의 장난이 너무 짓궂다

     

     

    억새 / 권오범

     

    서슬이 시퍼런 성깔

    태곳적부터 알고 있었건만

    낮술 먹고 아리아리해

    띠로 착각한 것이 잘 못 이었다

     

    소 혓바닥은커녕

    염소 입술도 못 베는 것이

    내 살만 보면

    왜 그렇게 환장하는지

     

    반팔 반바지 선바람 벌초에

    맘만 데 바빠 덤벙대다 피 보고 나니

    오금이 저리도록 쓰린 사지

    , 다 늙어 언제 철들라나,

     

    억새 / 박남준

     

    꽃이 있었네. 하얀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
    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억새풀 / 도종환 

     

    당신이 떠나실 때 가슴을 덮었던 저녁 하늘
    당신이 떠나신 뒤 내 가슴에 쌓이는 흙 한 삽
    떠나신 마음들은 이런 저녁 모두 어디에 깃듭니까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풀.

     

    억새는 떠나보내며 운다 / 이효녕

    바람 따라 온몸 살그머니 흔들며

    산기슭에서 서로 만나 눈 맞아 살다가

    허리 꺾어 몸 누운 채

    떠나는 시간 가까워도 차마 말 못하고

    지난 눈물 말린 꽃잎 반짝이며

    허공의 머리 풀어낸 시간 뒤에서

    몸을 비워가며 그리 우는가

    파장의 적막이 내어준 그리움 깊어

    기도 속에 영혼을 불러들이려는

    마음 위로 맴도는 사초(莎草)도 시들어

    아쉬운 작별 나누기도 서러운데

    슬프도록 아름답게 떠나가는 사람아

    이 세상 어딘가 사라진다 해도

    풀벌레 울음소리로 물든 잎사귀 날리며

    이 밤 이별의 손 그리도 흔들어

    정든 누구를 떠나보내며 우는가.

     

     

    가을 억새 밭에서 / 정은정

     

    저 혼자 저물어 가는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바람이 불어야 몸짓을 시작하며

    능선마다 출렁이며 털어 내는

    비늘을 품에 안고

    역류하는 해를 마주한

    억새의 어깨가 눈부시다는 걸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아름다운 것들도 언젠가는

    푸석한 잡초가 되고

    계절이 깊어지면

    산 속의 바다도 쓸쓸해진다는 것을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빛이 사라지면 스러지고

    빛을 받으면 타오르는

    고개 숙인 가을을 아쉬워하는

    남자 같은 것이 억새란 걸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안다

    꽃처럼 피어나고 싶어

    뜨거움도 비우고

    혈기도 비우고

    비울 것 다 비우고

    성성한 백발로 서서

    거울처럼 빛을 퉁기며

    한줄기 억새로 서 있는

    그 섬이 자신이란 것을.

     

    억새꽃 / 김덕성

     

    꽃이 아닌 줄 알고

    다가섰더니

    꽃이란다

     

    벗 삼아

    다가오는

    갈바람을 반갑게 맞으며

     

    사랑을 나누며

    함께 춤추며 노니는 모습이

    한결 사랑스럽다

     

    부드럽고 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여인의 백발

     

    센 바람은 그만

    잔잔한

    사랑의 갈바람으로

    따뜻하게 안아 주렴

    억새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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