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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 관한 시모음<1> [추위] [한파]시모음 2022. 12. 14. 16:49
추위에 관한 시모음<1> [추위] [한파]
첫 추위 / 박인걸
살을 베는 듯 한 바람이
그 해 한강교를 건너던 사내의 양 볼을
쉼 없이 후려치던 새벽바람은
내 생애에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다.
소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는
어느 병사의 비장함처럼
생존(生存)을 위한 현실의 벽을
넘는 일은 악몽(惡夢)이었다.
악착같이 헤쳐 나가야 할 숲은
길 없는 원시림(原始林)같아
초라하게 피다 지는 한 송이 들꽃이
그지없이 부럽기만 했다.
한 해 겨울 새벽을 고스란히
등잔불처럼 흔들리며 걷던 기억이
첫 추위가 옷솔기로 파고들 때면
심장 주위가 갑자기 아파온다.
북극 추위 / 백원기
하루 스물네 시간 함께 해
고마운 줄 모르고 마시던 공기
모르는척해서 야속한가
엊그제부터 심술을 부린다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앉아
얼음장 같은 냉기를 뿜어대며
기세가 등등하다
두껍게 막아서려 해도
보이지 않는 틈새까지 파고들어
여기가 동토인가 싶고
문 열린 얼음 창고처럼
하얀 입김이 춤을 춘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듯
서로 돕고 돕는 공생의 삶
다시는 잊지 않으마
세상 사람 거친 입 다물게 하고
미운 발 붙잡아놓는 성난 공기
너를 바라보며 풀릴 그 날을 기다린다
맹추위 / 손병흥
좀처럼 얼지가 않던 바닷물까지도 꽁꽁 얼려버릴 정도로
혹독한 찬바람 휘몰아치는 동장군의 드센 이름값 그 위력
실감날 정도로 연일 영하를 밑도는 매서운 추위와 바람이
엄청난 한파 되어 우리들 곁에 다가서버린 차디찬 이 계절
눈보라마저 사정없이 휘몰아쳐 맹위를 떨치는 이 엄동설한에
날이 갈수록 점차 독감에 걸려버린 감기환자도 늘어나는 시기
하루 종일 유래 없이 스며들어 살을 에는 최강의 겨울철 칼바람
쉴 새 없이 파고들고 엄습해오는 나날 더욱 낮아져버린 체감온도
추위 타는 동백꽃 / 박종영
외딴섬 겨울 동백꽃이
지난밤 하얀 눈 고깔을 쓰고 우쭐댄다
어젯밤은 저토록 백설의 면사포를
머리에 이고 누구에게 시집을 갔는가,
삼동의 추위에 얼마나 융숭한 관능의 지혜를 배웠을까
은근히 오기가 나서
오죽하면 눈발(雪)에 헤픈 가슴 열었느냐고 놀려대자
반짝이며 수줍음 타는 노란 꽃술
그때, 한 줌 둥근 웃음 만들어
스르륵 가슴을 만지며 넘어지는 눈덩이,
소한 추위 앞세워 시샘하는 칼바람이
동백꽃의 아랫도리를 후려친다
놀라 가로막는 만삭의 낮달이 더운 바람을 준비한다
바닷바람이 항해의 돛을 달고
작은 섬이 들썩거리며 분주한데
이 겨울에, 조매화(鳥媒花) 네 슬픈 이야기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도 젖가슴이 따스해 지는 것을,
동박새 울음에 통째로 떨어지는 꽃봉오리가 아뜩하다.
한파 / 오보영
얼어버렸다 모든 게 다
숲도 나무도..
산새 울음도
다 그쳐버렸다
휘몰아친 북풍 회오리에
마구잡이 파헤치는 두더지들 등살에
숲에 사는 모두의
머리가
가슴이
다 굳어버렸다
엄동설한 / 박인걸
혹독하게 추운 날이면
아버지의 고독이 떠오른다.
극빙(極氷)의 가난과 싸우며
얼음장같은 세월을 보냈다.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한 톨 쌀알을 골라내며
부서진 널빤지를 모아
가산(家産)을 일으키신 억척
지게를 짊어진 어깨에
가족이 매달려 허리가 휘고
갈퀴가 다 된 손발은
아등바등 살아온 흔적이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의연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한파 / 나상국
갈대가 길게 드러누워
가만히 숨죽이던 밤
달빛은 저리도 처연한데
저 멀리
골짜기 헤매던 고라니 울음소리
강둑으로 내려와
언 강물에 그림자 깊게 드리우니
바람소리도
손 시리게 화답을 한다
마지막 잎새 떨어지 듯
멀어져 간
그 사람 소식은 알 수 없고
발만 둥 둥 둥 출렁다리 건너 듯
구름 속을 헤매는데
겨울밤은
또 왜이리도 춥기만 한가
주머니 속 맞잡았던
따뜻했던 체온은
가슴속에
깊은 문신으로 남았는데
오돌돌 돌 한기가 엄습해 온다
詩人과 電氣난로 / 이인석
전기난로를 켜놓고
아내를 불렀다
낙엽 같은 손을 쪼이며
화안해지는 아내의 모습
“부자가 된 것 같구려”
암, 흐뭇하겠지
나는 큰 선물이나 한 듯 흡족한데
아내는 이어 스위치를 끈다
보기만 해도 따스하다고
스위치를 끈다
오랜 세월을 氷河에서 살아온 아내여
구공탄에 시달리는 아내여
추위를 참는 게 습성이 되어
고생을 견디는 게 습성이 되어
이만 사치도 황송만 한가
높으신 양반들은
요정에서 던지는 팁만도 기만원인데
팁만도 못한 값의 전기난로
여름도 겨울도 없는 邸宅에선
쓰레기통으로나 들어갈 전기난로
그러나 우리에겐 황송한 사치
전기난로를 켜놓고
다시 아내를 불렀다
난로의 石英管서 나오는 赤外線은
미용에 좋다고 허풍을 떨었다
아내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담고
“꽃도 철이 있다우”
시인은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자랑스러운데
아내는 오분도 못 되어 스위치를 끈다
한 시간에 이십원의 전기요금이 무서워
한사코 스위치를 끈다
다이어몬드도 外製車도 시들하기만 한
나으리들 마누라나
서민의 아내나
무엇이 다르랴 여자의 마음
꽃피는 시절도
찬란한 소망도
빙하 속에 묻어버린 시인과 아내는
불 꺼진 난로 앞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가슴이 메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파 / 최원정
아이는 속이 쓰려 죽을 먹으면서도
어미에게는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 얘기가 없었다
못난 어미가 투병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걱정 끼쳐드릴까 싶어 그 많은 끼니를
일터에 나가 죽으로 달래고 약을 먹으면서도
집에 와선 내색 한 번 안하며
회사 서랍 속에 약을 넣어놓고 다녔다는 걸
입술이 부르트고 나서야 알았다
사회 초년병인 아이는
일에 적응하기도 힘들 텐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못난 어미,
무슨 염치로 시라는 걸 쓰고 있는지
봄은
문턱에 와 있는데
가슴은
엄동설한이다
동장군(冬將軍) / 주응규
달빛마저 움츠려 떨고 있는 밤
싸늘한 눈초리에 냉기 오싹한
서슬 퍼런 동장군은
문풍지 틈새를 비집어 든다
군불 땐 여염집 구들방을 점거하여
제 몸 편히 눕히고자
이 집 저 집을 들쑤셔 다니는 불청객
곱잖은 눈으로 싸느랗게 흘기는
뭇 님네의 매몰찬 괄시에
시름시름 기력 잃어가는
동장군의 눈물방울에
봄이 가물가물 피어난다.
동장군 / 이환규
햇빛 좋은 겨울날
보이지 않는 바람 불어와
앙상한 가지 흔들어 놓는다
한파에 시려운 손
입김 호호 불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달려오는 동장군의
말고삐를 틀어쥐어
엉덩이 내려쳐 돌려보낸다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에
시선은 저만치 살짝 던져두고
먼발치서 살포시 새해를 맞이한다
한파 (寒波) / 허욱도
겨울이 머무는
봄 언저리에 서 있다.
냉골이 되어버린 세상
어디가 윗목인지 아랫목인지 모르겠다
불 지피면 없어질는지
한숨도 얼어버린 세상
무엇이 입김인지 한숨인지 모르겠다
후 불면 녹아질는지
강도 얼고
내 마음도 얼었다.
날씨는 차가운데 / 백원기
육이오 전쟁처럼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움츠려 자라목이 된다발길 앞에 떨어지는
빛바랜 낙엽
무성했던 시절이 그리워최후 하나까지
삼천궁녀처럼
두 눈 꼭 감고 뛰어내려
날리는 치맛자락 애처롭다석양에 부는 바람 차가운데
어찌하나 망설이다
정처 없이 떠나려나 보다
보리추위 / 나태주싸리꽃 필 때 오동꽃 필 때
오슬오슬 살로 오는
살추위.
싸리꽃 분홍에 얹혀
오동꽃 보라에 얹혀
살살살 살을 파는 살추위.
고구려에 사시던 임이
예서 이렇게 나[我]와 이 아침
런닝샤쓰 바람으로 만나라고
일찍이 맞추어 보내신
이만큼의 살떨림 한 떼.
지금도 고구려의 하늘에 사시는
나어린 내 임이
자네 그 동안 강녕하신가,
멀리 물어오시는 안후.
보리모개 팰 때 누리누름에 실려
쑥꾹새 울음 울 때 쑥꾹새 울음 속에 고개를 넘어
오슬오슬 살로 오는 살추위
얌전하디 얌전한 보리추위 한 떼여.
혹한(酷寒) / 박인걸눈에 발을 묻고
발가벗은 몸으로
찬바람 휘몰아 칠 때면
울고 서있는 나무들처럼
햇살은 구름 뒤에 숨고
봄은 아직도 먼데
하늘마저 파랗게 언
엄동(嚴冬)에 심하게 떠는
희망의 불꽃도 꺼진
용기마저 사라진 지금
눈빛마저 풀려버린
방향을 모르는 무리들
차가운 나뭇가지를 붙들고
밤새우는 산새처럼
혹한에 떠는 사람들의
아우성에 눈물이 난다.
행복은 신기루 같고
현실은 언제나 지겨워
새해가 와도 기쁘지 않은
한랭 전선이여 걷혀다오.
한파 / 나상국
발가벗은 나목의
젖가슴 어루만지며
희롱하던 바람
어디론가 떠나고
숲의 울음소리
추행범 잡으려는지
한가로이 뛰어 놀던 노루
이 골짜기 저 골짜기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쏜살같이 뛰어간다
잔뜩 물먹은 솜뭉치 같던 구름
더는 하늘의 원망이 두려워
탈수를 한다
천 리 먼 길
쏟아져 내리며 뜨겁던 원망
쫓겨난 설움에 싸늘히 식어
감기 재채기에 천지 사방으로
하얗게 쌓여만 간다
비탈길 오르던 자가용
헛바퀴에 뒷목이 당겨
혈압이 오르고
수도 계량기 터지는 아침
노루도 길을 잃고
햇빛도 연신 미끄럼질이다
삭풍이 읽고 간 몇 줄의 시 / 오정국나는 正東津에도 가보지 못한 채 시를 썼다 東江에도 가보지 않고 시를 썼다 배롱나무도 모르고 시를 썼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목 디스크 걸린 시인이 되어 15년 만의 강추위로 인적이 끊긴 밤, 시집을 읽었다 행간의 기쁨과 슬픔, 노여움으로 추위를 견뎠다 언 손이 풀려 담배 몇 개비를 태우고, 무심코 팔 뻗어 거실의 문을 여는 순간, 영하 18도의 바람이 단숨에 책갈피를 넘겨 몇 줄의 시를 읽고 사라졌다
나는 언제나 추운 쪽으로 머리를 두고 시집을 읽었다
얼음 속의 물고기는
언제나 물이 흘러오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몸이 얼어도 죽지 않는 것들
結氷의 한 시절을 견디는 것들
영하 18도의 바람이 결빙의 하늘 속으로 데려간 문장들이 있다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揚力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風磬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목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肝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동장군 / 권오범
출근길 가로막고 사랑 한번 해보자고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모가지부터 아랫도리까지 더듬으며 쫓아와
종종걸음으로 피신한 지하철 입구 에스컬레이터
제까짓 것
생각 없고 넉살 좋아
기세 등등하게 식식거리지만
심해까진 따라오지 못하겠지
허술한 미니스커트 매무새인
앞선 아가씨
나보다 더 파렴치하게 당했나보다
자꾸만 코를 훌쩍대는 것이
느닷없이 시공 초월한 유년의 초가삼간
그땐 더 악랄했지만 샘물이 따듯해
문고리 시켜 손가락이나 잡아보려는
아기자기한 낭만이 있었는데
자화상 / 마종기
흰색을 많이 쓰는 화가가
겨울 해변에 서 있다.
파도가 씻어버린 화면에
눈처럼 내리는 눈.
어제 내린 눈을 덮어서
어제와 오늘이 내일이 된다.
사랑하고 믿으면, 우리는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다.
실패한 짧은 혁명같이
젊은이는 시간 밖으로 걸어나가고
백발이 되어 돌아오는 우리들의 음악,
움직이는 물은 쉽게 얼지 않는다.
그 추위가 키워준 내 신명의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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